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용 정씨(문종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431년(세종 13) [[세종(조선)|세종]]은 [[경복궁 사정전]]에서 [[문종(조선)|왕세자 이향]]의 후궁을 간택하였는데, 가산군지사 [[현덕왕후|권전(權專)의 딸]], 장흥고 직장 [[숙빈 홍씨|홍심(洪深)의 딸]]과 함께 정씨를 낙점하였다.[* 세종실록 51권, 세종 13년 1월 19일 갑신 6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1301019_006|#]] ] 이때 세종은 정갑손을 장령(掌令)[* [[사헌부]]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으로 시정을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여 탄핵하는 일에 참여하고, 때로는 어사가 되어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삶을 살폈다. ]으로 삼고, 쌀과 콩 30석을 내려주었다. 승휘(承徽)가 된 정씨는 아들을 낳았으나, 오래 살지 못하고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.[* 세종실록 112권, 세종 28년 6월 6일 임인 2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2806006_002|#]] ][* 만약 오래 살았다면, 비록 [[서자]]이지만 문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[[세조(조선)|세조]]에게 경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. ] 1451년(문종 1) 정갑손이 죽었는데, 그의 졸기에 '딸은 자라서 후궁(後宮)에 들어가 소용(昭容)이 되었다.'고 썼다. 이것으로 볼 때, 문종이 즉위한 뒤에 정3품 소용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.[* 그런데 이때 같이 간택되었던 홍심의 딸은 종1품 귀인으로 봉작되었으니 품계에 많은 차이가 난다. ] 그 이후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. 다만, 문종의 사후에 그의 후궁들은 모두 수성궁(壽成宮)으로 옮겨 거처하였기 때문에 소용 정씨도 수성궁에서 살았을 것이다.[* 수성궁은 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던 궁가로, [[연산군]] 대에는 [[성종(조선)|성종]]의 후궁들이 들어가 살면서 정청궁(貞淸宮)으로 개칭한다. 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